"울지말고~!"
어두컴컴한 내시경실에 휠체어를 타고 바지에 똥을 싸며 들어가 들은 나의 담당의 양원열 교수님의 첫마디였다.
하루종일 똥이 곧 나올 듯,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똥을 속옷에 쌀 것만 같아 정말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 손으로 핸드폰을 하는 행위조차도 버거워 가만히 누워있게만 만든 지긋지긋하고도 독했던 변비! 나올락말락 문 틈에서 고개만 빼꼼빼꼼 내밀며 "안녕! 나 여깄지~!" 인사만 하고는 들어가 숨던 소극적 개구쟁이 나의 변비는 그렇게 묵직한 존재감으로 나와 분리되기 싫어 보름여간 장난을 치며 함께 생활했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작별을 하고 싶었던 나는 변비에 좋다는 키위,사과,우엉,들기름,미역 등의 지원군을 불렀으나 그는 고집스럽게도 버텼고 엄마는 약국에서 변비약을 사다 줬지만 그래도 나는 끝끝내 약은 먹지 않고 버텼다.
그저 변비였으면 아마 내가 이길때까지 나는 병원행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년 11월... 한창 무수한 과제더미와 강의들에 파묻혀 바쁘게 공부하고 기말시험을 준비해야 할 예민한 시기에 나는 평소 10일 가까이 하는 생리를 끝낼 무렵 다시금 갑작스레 미친듯이 나오는 40여년만에 처음 보는 어마무시 한 양의 생리도 아닌, 그저 핏덩어리와 맑은 물이 계속 나오는 이상한 현상을 보름 가까이 겪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지고 정신 차리고 일어나 또 쓰러지고 그렇게 일어나고 쓰러지고 정신 차리고 무슨 오뚜기 카레 아닌 배불뚝이 오뚝이마냥 그러길 수차례에 걸쳐 힘겹게 겨우 침대에 몸을 뉘인 후 나는 거의 일어나지를 못하고 화장실 갈 때,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밥도 못 먹고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으며 꼭 손글씨로 써 내야하는 과제들도 옆으로 누워서 쓰며 과제를 겨우 해 내고 강의를 보면서 시험을 치르기 위해 앉을 수는 있을까를 걱정했다.
씻을때도 화장실에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서 씻어야 했고 걸을때는 옆의 물체나 하다못해 벽이라도 뭐든지 잡아야 했고 1분 이상 앉아 있기도 힘든 ... 그런 심각한 상태에서 밥은 며칠,몇 주를 거르고 물과 쥬스로 연명을 해도 강의를 보고 겨우 앉아 시험을 치고 그렇게 12월까지 힘든 시간을 보낸 후 방학 기간 몇 달을 꼼짝도 못하고 누워서 간만의 휴식시간을 조금 가졌다.공부를 조금 소홀히 하고 휴식시간과 수면시간을 조금 늘렸더니 컨디션이 돌아오는 듯 했으나 여전히 상태는 좋지않아 오래 앉거나 서거나 걷는 것 조차도 불가능했다.
"부작용! 변비! .... "
오빠가 약국에서 사 온 '철 결핍성 빈혈약'을 보고 나는 부작용을 확인하고 변비를 걱정했다..
오빠는 병원에 입원 한 엄마덕에 혼자 집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밥도 못 먹고 누워있는 나를 위해 빈혈인 것 같다는 내 말에 빈혈약과 또 빈혈약과 함께 먹으면 좋다는 오렌지 쥬스를 잔뜩 사들고 김밥까지 포장해서 문병 온 것이었다.
그리고 한달치가 들어있는 박스에서 나는 겨우 7개 정도만 먹은 것 같다.
원래 몸에 열이 많아 상열하한증이던 나는 정말 모기들의 맛집으로 여름만 되면 늘 모기 가족들과 살 맞대고 붙어 살고 가을,겨울까지도 나를 찾아오는 모기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는데 갑상선기능저하증으로 몸이 차가워지고 몸이 피로하고 질병에 시름시름 앓자 미식가인 모기들은 맛이 변했는지 더이상 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를 않아 나는 어느순간부터 전 세계의 모기가 다 멸종 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꽤 오랜기간 동안 모기를 보기는 커녕 모기의 앵앵거림조차 들어보지 못 한 내게 모기가
"나? 멸종은 무슨... 이렇게 잘 살아있지~!"라며
내 손톱위에 날아앉아 나와 눈맞춤을 한 건 빈혈약을 뜯고 난 후! 정말 오랫만의 만남이였으나 여전히 모기란 놈은 내 피를 먹지는 않고 " 아이구..다른 집 찾아가야겠네. 이 집 피는 먹을게 못 되. 내가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 먹지." 라며 빠이하고 날갯인사를 하며 날아갔다.
오빠에게는 고맙다고 잘 먹고 있고 덕분에 많이 좋아졌다고 하며 나는 비밀리에 빈혈약을 중단했는데 오빠는 수시로 빈혈약은 몇 개나 남았는지,다 먹었는지,더 사다줄까? 자상히도 챙겼고 나는 변비 걱정에 안 먹고 있다, 아직 많이 남았다,정말 급할 때 하나씩 먹으려고 아끼고 있다라 했으나 몇 개나 먹고 몇 개나 남았는지, 그게 먹었다 안 먹었다 그런 약이 아니네.. 꾸준히 먹어야 되니 일단 한달치 한 박스라도 꾸준히 먹어보라며 그렇게도 설득을 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변비가 아닌 설사가 나오길래 음...부작용이 변비가 아닌 설사로 오나? 생각하며 몇 달이 지나고서야 그렇게 지독한 변비에 시달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날 오후,
화장실에서 변비와 새로운 날의 인사를 나누고 나오던 중 또 다시 쓰러졌나보다.. 쓰러진 기억은 없으나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의식을 되찾고 눈 떠 보니 화장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일어날 수가 없어 기어서 침대에 가서 누웠다.
심장이 아파오고 오심이 일어 나는 잠을 청했다.
퇴근 후 찾아 온 오빠와 또 다시금 몇 년간 지겹게 벌인 토론 끝에 엄마와 오빠랑 그 날 밤 나는 응급실행을 바로 결정했고 접수에서 정말 상세히 자세히 이런저런 증상들과 몸 상태와 병원을 찾은 이유를 설명을 했는데 아무도 모르는 사이 소화기내과 양원열교수님이 담당의로 접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고 나는 이 변비가 교수님과 나의 인연으로 만나게 하기 위해 그동안 다리 역할을 하고자 그렇게 버티며 들어앉아 있었다 여긴다.
"아... 똥!이 계속 나와.. 일어날 수가 없어!!!"
나는 관장 후 10여분간 시간을 주고 바로 내시경을 하러 가자고 나오라고 재차재차 재촉하는 간호사들에게 화장실에서 변기에 앉아 소리를 질렀다.
분명 담당의 선생님에게서는 변비는 먹는약으로 해보자는 얘기를 들은 기억인데 갑자기 커다란 주사기를 손에 들고 나타나 관장을 하자는 간호사에게 찔림을 당하고, 일어서면 나오고 나가려면 나오는 물똥들 때문에 변기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으나 계속 된 재촉에 그 상태로 내시경실을 가다 나는 또 바지에 똥을 지렸던 것이다.
"아~! 바지에 똥 쌌어~!"
내시경실에 도착하자마자 인사고 뭐고 난 바지에 똥 쌌다고 징징거렸고 휠체어를 타고 온 나를 보고 내시경 검사판 위로 기어오르는 나에게 맞은편에 서 있던 간호 선생님은 "혼자 올라올 수 있으세요?" 라며 물었고 나는 "아니오!!! 움직이면 쌀 것 같아요!!!"라며 얼어있자 육중하고 무거운 내 몸을 세 명의 간호사가 옷을 붙잡고 끌어당겨 나를 눕혔고 그 와중에 나는 또 추가로 양을 더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옆으로 돌아누워 "아... 또 쌌어~!!"라며 흐흑거리는 내게 던진 첫마디가 앞서 언급한 "울지말고"라는 육중한 저음의 남자목소리...
당시에는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 분이 나의 담당의 양원열교수님이셨던 것이었다.
나는 한참 뒤 까지도 방사선실,초음파실처럼 내시경실도 담당 교수님이 아닌 내시경 전담 의료진이 있는 줄...
그렇게 얼굴이 아닌 똥 싼 팬티와 숙변으로 가득찬 나의 은밀한 부위를 눈과 코 앞에 들이밀며 우리의 첫 만남은 이루어졌다.
그 이후로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어 기절한 줄 알았으나 나중에 엄마가 말 해 주기를 마취를 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순간에 아무런 말도 없이(혹은 내가 기억 못 하는 걸 수도 있다) 빠른 시간에 마취가 될 수 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내가 마취에서 완전히 깨기전, 힘겨운 지침 속에서 살포시 뜬 무거운 눈꺼풀 밑의 눈동자에 맺힌 상은 저 멀리 엄마와 의사로 추정되는 어느 한 남성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온화한 느낌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고 나는 "어...엄마가 왜 저기있지? 또 무슨 얘기를 하는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깊은 수면상태로 빠진 것 같다.
폭신하게 부드러운 도톰하고 따스한 손이 내 어깨를 세,네번 가량 가볍게 토닥여주는 기분좋은 느낌에 마치 백마 탄 왕자의 키스에 잠을 깬 백설공주마냥 의식이 돌아와 잠에서 깼다. 그리고 또 다시 살짝 뜬 눈에는 멀찌감치서 왔다갔다 내 앞 침상에 누워있는 여러 환자들과 나를 돌아보며 미소짓고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길 기다리는 한 남성의 모습이었고 나는 안경을 써야만 겨우 0.3 정도가 나올까말까 눈 뜬 장님이라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도 그저 느낌상으로 저 멀찍이서 돌아다니는 그 분이 마치 아빠처럼 느껴졌고 나를 보며 미소짓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애정결핍인지 스킨쉽을 좋아하고 타인의 관심과 사랑에 늘상 굶주리며 남녀노소 불문하고 붙는 경향을 가진 나에게 그의 따스한 토닥거림은 곧 바로 그에게 호감을 갖게 하고 잊을 수 없는 따스함과 포근함을 주었다.
그의 그 손길은 아빠의 토닥거리는 손길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가끔 양원열 교수님을 보면 나이는 나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동안외모를 가지셨지만서도 "아빠"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렇게 시작 된 우리의 인연,
다음날? 아니..다다음날? 이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가진, 물병 아닌 질병의 특성 때문이리라...
병동으로 회진 온 양원열교수님의 얼굴을 처음 본 나는 앞에 서 있는 분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환자 이름표에 적힌 담당의 교수님의 이름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 분은 아직 안 오셨고 뵌 적 없다며, 나에게 처음 찾아 오신 분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본인이 듣기에는 얼마나 황당하고 웃긴 상황이었을까..
그러나 교수님은 "그래요?"라며 티 내지 않고 자기가 누구인지 굳이 다시 정정해서 알려주지 않고 그렇게 모른 척 나에게 맞춰주며 넘어가신 기억을 나는 가지고 있다.
안경을 껴도 잘 보이지 않는데다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도 못하기에 매번 매일 오실 때마다 느낌이 달라 가까이서 빤히 뚫어져라 쳐다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눈빛을 꼭꼭 따라 맞춰주며 나에게 시간을 주는 것은 아마도 내가 기억을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한 배려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모르겠다... 그저 나의 추정 된 생각일 뿐 사실이 무엇인지는..
이상적인 하혈에서 시작하여 빈혈,변비,실신으로 이어진 인연의 끈은 여기서 끝난건지 아직도 그 끈은 더 길게 남아 있는지 나는 아직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정말 오랜시간 가족들의 설득과 비난 그리고 구급차와 구급대원을 동반한 강제연행과 같은 협박 속에서도 병원은 가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던 내가 이렇게 내 발로 병원을 찾아가게 된 것은 분명 선생님과 만나야만 하는 인연이 있었기에 그러한 것이라 나는 믿는다.
각종 검사결과가 좋지 않아 계속 보자는 선생님에게 나는 오지 않겠다는 대답을 드렸으나 인연이 닿으면 또 보게 되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만큼 병원 가는 것을 싫어하고 약 먹는 것도 싫어해서
병원에서 주는 약은 매번 한 알 한 알 따져가며 골라먹고 빼달라고 부탁드리고 퇴원약은 거의 먹지도 않았다.
내게 갑상선기능저하증 확진을 해주신 내분비내과 교수님은 갑상선 기능이 10%도 안 남았다며 매우 심각한 상태이고 응급치료를 요하는 상태라며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병원을 안 갔냐? 이렇게 의료서비스가 좋은 한국에서 왜? 사망 할 수도 있다..라 하셨지만 나는 퇴원 후 여전히 약을 먹지 않고 있다.
나는 약을 먹지 않는다고 말씀 드리면 한심한 듯 비난하고
"병이 낫기 싫은거지? 살기 싫으냐? 병원은 왜 왔냐? 난 모르겠다.. 다음에 이 병원 다시와도 나 찾지말고 다른 의사한테 진료 받아라. 난 너 포기다. 내가 너에게 해 줄게 없다." 등등 협박하고 화내고 으름장을 놓건 포기를 하건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두려움에도 솔직함을 좋아하는 성격이기에 괘씸한 솔직함으로 약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부작용 걱정에 못 먹겠다,약은 안 주셔도 된다, 어차피 안 먹을 것이다라는 내 말에 인상 한 번 안 쓰고,찌푸림 한 번 없이 내 모든 말을 경청하고 의견을 존중해주며 흔들리지 않는 차분한 눈빛과 목소리로 내가 원하는 요구를 두 말 없이 들어주고 그 어떠한 것도 강요하지 않는 양원열 교수님이 너무 좋다.
두 번의 교통사고(그러고보니 두 번 다 오토바이 사고였다. 한 번은 오토바이에 치인, 신호등 없는 건널목 중간에 서 있던 하교길의 초등학생 행인으로 치인 것이고 또 다른 한 번은 당시 열풍이었던 핑크색 미니 스쿠터를 타고 갓길로 천천히 달리던 나를 그 넓은 8차선 도로에서 차도 없는 이른 아침 해 뜨는 시각에 굳이 내 옆으로 바짝 붙어 광속으로 굉음을 내며 달려가던 차가 나를 친 것이고 .. 저 멀리서 부터 그렇게 달려올 때 불안했는데 일부러 그랬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상황..헬멧이 아스팔트에 긁혀 파인 것을 보며 이 헬멧 안 썼으면 난 죽었을까??? 저게 내 머리라면... 헉!), 질병으로 인한 응급실행 및 약물중독 등등... 타병원에서의 입원생활은 늘 퇴원을 안 시켜준다는 강한 불만감을 줬기에 나는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으나 그래도 말씀을 드려보자고 꺼낸 퇴원 얘기에 양원열 교수님께서는 퇴원 하고 싶냐는 딱 한 번의 질문 후 곧바로 승낙해서 다음날 바로 퇴원 시켜 주셔서 깜짝 놀라기도 했고 매일 아침마다 뵙는 반가운 교수님을 떠나 더이상 만날 수 없음에 서운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9과목이나 수강 하는 이번 학기의 강의를 입원 1주일 기간 동안 밤이건 낮이건 단 하나도 집중해서 보지 못한채 학기가 흘러가고 있음에 불안하고 도저히 안되어 그렇게 퇴원을 했다.
병원 가는 것을 싫어하니까 매번 응급실만 찾게 되는 나는 퇴원 후 외래 예약도 갈까말까를 2주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다.
원래대로라면 안 갈 나 이지만 예약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교수님과의 약속으로 다가왔고 그걸 어기기도 미안할 뿐 더러 무엇보다 양원열 교수님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나 보고싶고 좋아하는 양원열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외래진료를 갔고 전체적으로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부인과 검사결과도 듣게 되었다.
나는 그리고 나의 담당의! 양원열 교수님과 병원놀이를 하고자 마음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병원놀이에서 중요한 필수준비물이 나에게는 하나가 있고 하나가 없다.
있는 것은, 모범환자로써의 심각한 질병과 의사에게 사명감, 연구욕, 호기심 및 크나큰 보람과 성취감을 줄 수도 있는 매우 건강하지 않은 신체이고 없는 것은, 금도 은도 백금도 다이아도 아닌 현금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현금을 준비해서 양원열 교수님의 환자 역할로 나는 병원놀이를 하고자 한다.
늘 환자의 의견을 존중 해 주고 비난하지 않고 차분하고 침착하고 신중하게 꼭 필요 한 최소한의 말만 조심스레 건네며 환자에게 불안감, 스트레스, 트라우마, 짜증과 불만 외 걱정 등 각종 부정적인 감정이 치료과정이나 상담 중 혹은 입원생활이나 투병 기간 중 생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써서 배려해 주고 확실하지 않은 정보로 말을 많이 해 불안감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 오랜시간 다양한 검사와 지속된 관찰 각 방면에서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꾸준히 하나하나 차근차근 살피며 확실하고도 꼭 전해야 하는 최소한의 정보, 단어 한마디... 툭 던져 주심에 스스로 무슨 뜻인지 텔레파시로 느낌으로 추측하고 깨달아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속 깊은 배려와 따스한 온정이라 여겨진다.
인간미 있고 정감 있고 따스하고 속 깊고 아빠같고 친구 같은 편안한 양원열 교수님은 환자를 세심히 관찰하고 배려하며 진정으로 걱정하고 챙겨주시는 직업적으로는 멋진 의사이시자 인간적으로는 한 명의 좋은분이시다.
2024년 벚꽃피는 3월의 봄날에 입원했던 한 환자가..